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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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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 공국은 1525년 튜튼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이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세속화되어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호엔촐레른 가문의 통치하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으로 발전했으며, 1618년 프로이센계 호엔촐레른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의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 1701년에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프로이센의 왕"으로 승격되었고,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 이후 동프로이센 주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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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공국
지도 정보
프로이센 공국의 지도
프로이센 공국 (노란색)
기본 정보
공식 명칭독일어: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일반 명칭프로이센
시대근세
통화라이히스탈러
지위폴란드의 봉토 (1657년까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일부 (1618년부터)
현재 국가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
정치 체제봉건 군주제
수도쾨니히스베르크
공용어저지 독일어
독일어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고대 프로이센어
종교루터교
면적30,000 km²
국기 및 국장
프로이센 공국 국기
국기 (1525–1657)
프로이센 공국 문장
문장
역사
시작 사건프로이센의 신종 서약
시작 년도1525년
시작 날짜4월 10일
종료 사건왕으로 즉위
종료 년도1701년
주요 사건 1빌라우 조약
사건 1 날짜1657년
군주
군주 직함공작
1대 공작알브레히트
1대 재위 기간1525년–1568년
2대 공작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2대 재위 기간1568년–1618년
3대 공작요한 지기스문트
3대 재위 기간1618년–1619년
4대 공작게오르크 빌헬름
4대 재위 기간1619년–1640년
5대 공작프리드리히 빌헬름
5대 재위 기간1640년–1688년
6대 공작프리드리히
6대 재위 기간1688년–1701년
입법부
입법부신분제
기타
통칭프로이센인

2. 역사

1525년 튜턴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이 개신교로 개종하고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이 세속화되었다. 튜턴 기사단은 1466년 폴란드의 공격으로 포메른 지방과 단치히를 상실한 이후 폴란드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프로이센 공국도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프로이센 공국의 상속은 알브레히트의 후손에게만 허용되었다.[2]

1618년 프로이센계 호엔촐레른 가문의 대가 끊기면서 본래 폴란드가 영토를 회수해야 했다. 그러나 스웨덴을 둘러싼 구교도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 바사와 신교도 칼 9세 간의 계승 전쟁, 루스 차르국 내전 등 복잡한 상황 속에서, 브란덴부르크계 호엔촐레른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알브레히트 2세의 사위 자격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는 것을 허용하였다. 단, 프로이센 공작으로서 폴란드의 봉신으로 남는 조건이었다. 이로써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통치 하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튜턴 기사단종교 개혁을 견뎌낼 수 없다고 보았고,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에게 기사단의 영토를 세속적인 공국으로 전환할 것을 권유했다.[6] 1525년 4월 10일, 알브레히트는 프로이센의 봉신 선서를 통해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 스타리로부터 "프로이센 공작" 작위를 받았다. 이로써 프로이센 공국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었다.

19세기 폴란드 미술관 (수키엔니체, 2022년 7월)의 ''프로이센의 봉신 선서'' (얀 마테이코 작, 1882년, 크라쿠프 국립 박물관): 1525년 알브레히트가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1세로부터 프로이센 공국을 봉토로 받는 장면.


1544년, 알브레히트 공작은 쾨니히스베르크에 알베르티나 대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대학교는 프로이센의 루터파 목사와 신학자들을 위한 주요 교육 기관이 되었다.[5] 1560년, 이 대학교는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트로부터 왕실 특권을 받았다.

1656년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을 통해 스웨덴의 봉토가 되었던 프로이센 공국은, 라비아우 조약으로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 완전한 주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폴란드 왕 얀 2세는 이에 대응하여 역제안을 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를 수락하여 1657년 9월 19일 베흘라우 조약을 체결했다.

베흘라우 조약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스웨덴과의 동맹을 포기하는 대가로, 얀 2세는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완전한 주권을 인정했다.[15] 1660년에는 올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들로 인해, 독일 기사단국으로부터 2세기 가까이 계속된 폴란드의 종주권은 종결되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프로이센의 왕”으로 승격되었다.

2. 1. 튜튼 기사단 국가의 쇠퇴와 프로이센 공국의 탄생

1525년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이 개신교로 개종하고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끊으면서, 튜턴 기사단의 영토는 세속화되어 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 튜튼 기사단은 1466년 폴란드의 공격으로 포메른 지방과 단치히를 상실한 이후 폴란드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프로이센 공국도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인정받았다. 프로이센 공국의 상속은 알브레히트의 후손에게만 허용되었다.[2]

1618년, 프로이센계 호엔촐레른가의 대가 끊기자, 원래 폴란드가 영토를 회수해야 했다. 그러나 스웨덴 왕위 계승 전쟁과 루스 차르국 내전에 폴란드가 개입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결국 브란덴부르크계 호엔촐레른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알브레히트 2세의 사위 자격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는 것을 허용하였다. 단, 프로이센 공작으로서 폴란드의 봉신으로 남는 조건이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가의 통치 하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

프로이센 공국은 1525년 알브레히트 프로이센 공작이 공식적으로 루터교를 받아들여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었다. 이 지역에는 독일어, 폴란드어(주로 마주리 지역), 리투아니아어(주로 소리투아니아 지역)를 사용하는 인구가 거주했다.[2]

종교 개혁 기간 동안 크라쿠프 조약에 따라, 튜튼 기사단의 대총장 알브레히트는 기사단의 지배하에 있던 프로이센 영토를 세속화하여 알브레히트 프로이센 공작이 되었다. 이 지역은 1466년 제2차 토룬 조약 이후 폴란드 왕국의 일부였기 때문에,[3]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는 종주권자로서 크라쿠프 조약에 따라 알브레히트 공작에게 이 영토를 폴란드의 세습적인 봉토로 하사했고, 이 결정은 1525년 4월 크라쿠프에서 있었던 프로이센의 봉신 선서로 확정되었다. 새 공작은 루터교를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국교로 설립했다. 수도는 쾨니히스베르크(현재 칼리닌그라드)에 남았다.

16세기 후반 폴란드 봉토로서의 프로이센 공국 (줄무늬)


이 공국은 1618년 호엔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상속되었다. 이 인적 동군 연합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으로 불린다. 브란덴부르크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57년 베를라우 조약에 따라, 그리고 1660년 올리바 조약으로 확정된 이후 공국의 완전한 주권을 획득했다. 그 후 수년 동안, 특히 쾨니히스베르크의 시민들이 조약을 거부하고 이 지역을 폴란드의 일부로 보았기 때문에 폴란드의 종주권으로의 복귀 시도가 있었다.[16][4] 프로이센 공국은 1701년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튜턴 기사단 국가의 평신도들 사이에 퍼지면서, 로마 가톨릭 지배에 대한 반감이 튜턴 기사단 내에서 시작되었다. 기사단의 대장이자 호엔촐레른가의 방계 출신인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는 기사단의 권위를 주장할 군사력이 부족했다.

폴란드 왕국 (1385-1569)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1523년 루터교로 개종한 그의 개인 주교인 포메자니아와 잠란드의 게오르크 폰 폴렌츠[5]와 이미 프로테스탄트 사상을 지지하는 여러 사령관들과 함께, 알브레히트는 과감한 해결책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522년 비텐베르크1524년 뉘른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는 그에게 기사단의 영토를 그의 개인 통치하에 세속적인 공국으로 전환할 것을 격려했다. 튜턴 기사단은 종교 개혁을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6]

1525년 4월 10일, 알브레히트는 자신의 지위를 사임하고 프로테스탄트가 되었으며, 프로이센의 봉신 선서를 통해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로부터 "프로이센 공작" 작위를 받았다. 루터의 중재를 거친 협상의 일부로, 프로이센 공국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어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조항을 앞질렀다.

알브레히트가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공개적으로 개종을 선언하고 테우토니 기사단의 정족수에 자신의 새로운 공작 지위를 알렸다. 이 결정에 반대한 기사들은 알브레히트의 지지자들과 쾨니히스베르크의 시민들에 의해 수용하도록 압력을 받았으며, 브룬스비크-볼펜뷔텔의 에릭(메멜의 콤투어)만이 새로운 공작에 반대했다. 1525년 12월 10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열린 회의에서 프로이센 삼부회는 교회 규칙을 결정함으로써 프로이센 공국에 루터교를 설립했다.[5]

알브레히트 통치 말기에 이르자, 대수도원장과 원수의 직책은 의도적으로 공석으로 남겨졌고, 프로이센에서는 55명의 기사만 남게 되었다. 일부 기사들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루터교로 개종한 후 프로이센 귀족과 결혼했고, 다른 일부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돌아가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7] 다음 대수도원장 발터 폰 크론베르크가 이끄는 이 남은 테우토니 기사단은 프로이센을 계속해서 주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프로이센 외부의 테우토니 대관구의 많은 영지를 유지했다.

1526년 3월 1일, 알브레히트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세의 딸인 도로테아 공주와 결혼하여 루터교와 스칸디나비아 사이에 정치적 유대를 맺었다. 알브레히트는 그의 형인 안스바흐 변경백 게오르크의 도움을 크게 받았는데, 그는 이전에 자신의 영토인 프랑코니아와 상실레시아에 프로테스탄트 종교를 확립했었다. 알브레히트는 또한 신성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의 프로테스탄티즘 때문에 그를 금지했기 때문에 폴란드의 그의 삼촌 지그문트 1세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테우토니 기사단은 토착 농촌 인구의 기독교화 임무를 표면적으로만 수행했으며, 국가 영토 내에 교회를 거의 세우지 않았다.[5] 로마 가톨릭에 대한 갈망은 거의 없었다. 발트 구 프로이센인과 프로이센 리투아니아 농민들은 일부 지역에서 여전히 이교도 관습을 실천했는데, 예를 들어 페르쿠나스 (페르쿠노스)에 대한 믿음을 고수했고, 이는 수염 난 숫염소, 포트림포, 그리고 피쿨로스 (파톨루)를 상징하며 "구운 염소 고기를 먹는 것"과 같은 행위를 했다.[8] 게오르크 폰 폴렌츠 주교는 1524년에 널리 퍼진 이교도 숭배의 형태를 금지했고 1540년에 다시 금지령을 반복했다.[5]

1524년 1월 18일, 게오르크 주교는 세례식에서 토착 언어를 사용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농민들의 세례 수용을 개선했다.[5]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종교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은 거의 없었다. 테우토니 기사단이 가톨릭을 가져왔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로의 전환이 더 쉬워졌다.[9]

1525년의 교회 규칙은 교구민과 목사들의 방문을 규정했는데, 이는 1538년에 게오르크 주교가 처음으로 수행했다.[5] 프로이센 공국이 명목상 루터교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국은 공국 전역을 여행하며 루터파 교리가 준수되도록 하고 이교도와 반체제 인사들에게 처벌을 가했다. 토착 출신의 농촌 인구는 프로이센 종교 개혁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기독교화되었다.[5]

1525년 삼비아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귀족의 과세, 종교 개혁의 논쟁, 그리고 테우토니 기사단의 남은 프로이센 영토의 갑작스러운 세속화의 결합으로 농민들의 불안이 악화되었다. 카이멘의 제분업자와 프로이센의 샤켄의 여관 주인을 포함한 비교적 부유한 반란 지도자들은 쾨니히스베르크의 동조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반란군들은 귀족들의 새로운 세금을 없애고 1에이커당 약 40에이커의 땅을 측정하는 숨겨진 땅인 마르크당 두 하이드의 이전 세금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가혹한 귀족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했지, 신성 로마 제국에 있던 알브레히트 공작에 대항해서는 아니었으며, 그들은 그에게 직접 맹세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국에서 돌아온 알브레히트는 들판에서 농민들의 회합을 소집했고, 그곳에서 그는 충성스러운 군대로 그들을 포위하고 아무런 사건 없이 체포했다. 반란의 지도자들은 그 후 처형되었다.[8] 더 이상 대규모 반란은 없었다. 프로이센 공국은 프로테스탄티즘과 분파주의의 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9]

1544년, 알브레히트 공작은 쾨니히스베르크에 알베르티나 대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대학교는 프로이센의 루터파 목사와 신학자들을 위한 주요 교육 기관이 되었다.[5] 1560년, 이 대학교는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트로부터 왕실 특권을 받았다. 이 대학교는 크라쿠프 대학교가 누리고 있던 것과 같은 권리와 자치권을 부여받았고, 따라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주요 대학교 중 하나가 되었다. 예배에서 토착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알브레히트 공작은 망명한 프로테스탄트 리투아니아 목사, 예를 들어 스타니슬라우 라폴리오니스와 아브라오마스 쿨비에티스를 교수로 임명하여 알베르티나를 리투아니아어와 문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10]

수도원 국가에서 공국으로의 전환에서 귀족의 구성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귀족의 종속 농민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었다. 쾰머라고 불리는 프로이센의 자유 농민들은 쿨름법에 따라 자유 영지를 소유했다. 쾰머는 경작 가능한 토지의 약 6분의 1을 소유했는데, 이는 봉건 시대의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많았다.[11]

행정적으로, 테우토니 기사단에서 공국 통치로의 전환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공식적으로 폴란드 왕관의 봉신이었지만, 알브레히트는 프로이센에 대한 자치 정부, 자신의 군대, 자체 통화 주조, 프로이센 삼부회 (독일어, ''란드타크''), 그리고 대외 관계에 대한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했다.[12]

2. 2. 프로이센 공국의 발전과 종교 개혁

1525년 튜턴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이 개신교로 개종하고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프로이센 공국은 세속화되었다. 프로이센 공국은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인정받았으며,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의 후손만이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2]

1618년 프로이센계 호엔촐레른 가문의 대가 끊기자, 폴란드가 영토를 회수해야 했으나, 스웨덴을 둘러싼 종교 전쟁과 루스 차르국 내전에 폴란드가 개입하면서 힘이 약해졌다. 결국 브란덴부르크계 호엔촐레른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알브레히트 2세의 사위 자격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는 것을 인정하고, 프로이센 공작으로서 폴란드의 봉신으로 남는 조건으로 허용해주었다. 이로써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가의 통치 하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튜턴 기사단종교 개혁을 견뎌낼 수 없다고 보았고,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에게 기사단의 영토를 세속적인 공국으로 전환할 것을 권유했다.[6] 1525년 4월 10일, 알브레히트는 프로이센의 봉신 선서를 통해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1세 스타리로부터 "프로이센 공작" 작위를 받았다. 이로써 프로이센 공국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었다.

알브레히트는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와 개종을 선언하고 테우토니 기사단에게 자신의 새로운 공작 지위를 알렸다. 반대한 기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알브레히트의 지지자들과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에 의해 수용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1525년 12월 10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열린 회의에서 프로이센 삼부회는 교회 규칙을 결정함으로써 프로이센 공국에 루터교를 설립했다.[5]

프로테스탄티즘이 튜턴 기사단 국가의 평신도들 사이에 퍼지면서, 로마 가톨릭 지배에 대한 반감이 튜턴 기사단 내에서 시작되었다. 알브레히트는 기사단의 권위를 주장할 군사력이 부족했다.

1526년 3월 1일, 알브레히트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1세의 딸인 도로테아 공주와 결혼하여 루터교와 스칸디나비아 사이에 정치적 유대를 맺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교회가 그의 프로테스탄티즘 때문에 그를 금지했기 때문에 폴란드의 지기스문트 1세 스타리의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다.

테우토니 기사단은 토착 농촌 인구의 기독교화 임무를 표면적으로만 수행했으며, 국가 영토 내에 교회를 거의 세우지 않았다.[5] 로마 가톨릭에 대한 갈망은 거의 없었다. 발트 구 프로이센인과 프로이센 리투아니아 농민들은 일부 지역에서 여전히 이교도 관습을 실천했다.[8] 게오르크 폰 폴렌츠 주교는 1524년에 널리 퍼진 이교도 숭배의 형태를 금지했고 1540년에 다시 금지령을 반복했다.[5]

1524년 1월 18일, 게오르크 주교는 세례식에서 토착 언어를 사용하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농민들의 세례 수용을 개선했다.[5]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종교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은 거의 없었다. 테우토니 기사단이 가톨릭을 가져왔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로의 전환이 더 쉬워졌다.[9]

1525년의 교회 규칙은 교구민과 목사들의 방문을 규정했는데, 이는 1538년에 게오르크 주교가 처음으로 수행했다.[5] 프로이센 공국이 명목상 루터교 지역이었기 때문에 당국은 공국 전역을 여행하며 루터파 교리가 준수되도록 하고 이교도와 반체제 인사들에게 처벌을 가했다. 토착 출신의 농촌 인구는 프로이센 종교 개혁부터 시작하여 완전히 기독교화되었다.[5]

1544년, 알브레히트 공작은 쾨니히스베르크에 알베르티나 대학교를 설립했는데, 이 대학교는 프로이센의 루터파 목사와 신학자들을 위한 주요 교육 기관이 되었다.[5] 1560년, 이 대학교는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2세 아우구스트로부터 왕실 특권을 받았다. 이 대학교는 크라쿠프 대학교가 누리고 있던 것과 같은 권리와 자치권을 부여받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주요 대학교 중 하나가 되었다. 예배에서 토착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알브레히트 공작은 망명한 프로테스탄트 리투아니아 목사들을 교수로 임명하여 알베르티나를 리투아니아어와 문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10]

행정적으로, 테우토니 기사단에서 공국 통치로의 전환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알브레히트는 공식적으로 폴란드 왕관의 봉신이었지만, 프로이센에 대한 자치 정부, 자신의 군대, 자체 통화 주조, 프로이센 삼부회 (독일어, ''란드타크''), 대외 관계에 대한 상당한 자치권을 유지했다.[12]

2. 2. 1. 농민 반란과 사회 변화

1525년 삼비아 반도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귀족의 과세, 종교 개혁의 논쟁, 그리고 테우토니 기사단의 남은 프로이센 영토의 갑작스러운 세속화는 농민들의 불안을 악화시켰다. 카이멘의 제분업자와 프로이센의 샤켄의 여관 주인을 포함한 비교적 부유한 반란 지도자들은 쾨니히스베르크의 동조자들의 지원을 받았다. 반란군들은 귀족들의 새로운 세금을 없애고, 1에이커(약 40에이커)당 마르크당 두 하이드의 이전 세금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농민들은 가혹한 귀족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주장했지, 신성 로마 제국에 있던 알브레히트 공작에 대항해서는 아니었으며, 그에게 직접 맹세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국에서 돌아온 알브레히트는 들판에서 농민들의 회합을 소집했고, 그곳에서 충성스러운 군대로 그들을 포위하고 아무런 사건 없이 체포했다. 반란의 지도자들은 그 후 처형되었다.[8] 더 이상 대규모 반란은 없었다. 프로이센 공국은 프로테스탄티즘과 분파주의의 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9]

수도원 국가에서 공국으로 전환되면서 귀족의 구성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귀족의 종속 농민에 대한 통제는 강화되었다. 쾰머라고 불리는 프로이센의 자유 농민들은 쿨름법에 따라 자유 영지를 소유했다. 쾰머는 경작 가능한 토지의 약 6분의 1을 소유했는데, 이는 봉건 시대의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많았다.[11]

2. 3. 브란덴부르크와의 동군연합

1525년 알브레히트 폰 프로이센이 개신교로 개종하고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를 끊으면서 프로이센 공국은 세속화되었다. 튜턴 기사단1466년 폴란드의 공격으로 포메른 지방과 단치히를 상실한 이후 폴란드에 충성을 맹세했으며, 프로이센 공국도 폴란드의 봉신국으로 인정받았다. 당시 프로이센 공국의 상속은 알브레히트의 후손에게만 허용되었다.

1618년 프로이센계 호엔촐레른의 대가 끊기면서 본래 폴란드가 영토를 회수해야 했다. 그러나 스웨덴을 둘러싼 구교도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와 신교도 칼 9세 간의 계승 전쟁, 루스 차르국 내전 등 복잡한 상황 속에서, 브란덴부르크계 호엔촐레른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알브레히트 2세의 사위 자격으로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는 것을 허용하였다. 단, 프로이센 공작으로서 폴란드의 봉신으로 남는 조건이었다. 이로써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통치 하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이 되었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정신적으로 약해지면서 조지 프리드리히가 1577년 프로이센의 섭정이 되었다.

지그문트 3세 국왕과 요아힘 프리드리히의 프로이센 섭정 협정(1605년), 요한 지기스문트와의 바르샤바 조약(1611년)을 통해 브란덴부르크의 프로이센 공동 상속이 확정되었고, 프로이센에서 가톨릭 종교의 자유로운 실천이 보장되었다.

2. 3. 1. 30년 전쟁과 국제 정세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하자, 이듬해 요한 지기스문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게오르크 빌헬름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프로이센 공작 지위를 계승했다. 게오르크 빌헬름은 1623년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에게 프로이센 공작 작위를 인정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확정되었다.[9]

1619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폴란드-스웨덴 전쟁 기간 동안, 공국은 1635년 폴란드 국왕 블라디스와프 4세 바사가 임명한 폴란드 정치가 예르지 오솔린스키에 의해 통치되기도 했다.[14]

많은 프로이센 융커들은 베를린의 호엔촐레른가 통치에 반대하며 지그문트 3세에게 구제를 요청하거나 프로이센 공국을 폴란드 왕국에 편입할 것을 요구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13]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두 영토를 연결하기 위해 왕령 프로이센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제2차 북방 전쟁 동안 스웨덴의 칼 10세 구스타프가 프로이센 공국을 침략하여 쾨니히스베르크 조약(1656년 1월)을 체결, 공국을 스웨덴의 봉토로 만들었다. 마리엔부르크 조약(1656년 6월)에서 칼 10세 구스타프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군사적 지원을 제공한다면 폴란드의 헬름노 지역, 말보르크 지역, 포메라니아 지역, 바르미아 공국을 양도할 것을 약속했다.[15]

전쟁의 흐름이 칼 10세 구스타프에게 불리하게 돌아서자, 그는 라비아우 조약(1656년 11월)을 체결하여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프로이센 공국과 바르미아의 완전한 군주로 만들었다.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국왕은 스웨덴-프로이센 동맹에 대한 대응으로 역제안을 제출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를 수락했다. 그들은 1657년 9월 19일 베흘라우 조약과 11월 6일 브롬베르크 조약에 서명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스웨덴-프로이센 동맹을 포기하는 대가로 얀 카지미에시는 프로이센 공국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완전한 주권을 인정했다.[15] 이로써 거의 200년 동안 폴란드의 종주권 아래 있던 프로이센의 테우토니아 수도원 국가와 그 후계자인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의 완전한 주권 하에 들어갔다.

17세기 쾨니히스베르크 전경


그러나 폴란드 종주권의 종식은 브란덴부르크의 절대주의를 두려워하고 폴란드 왕관의 일부로 남기를 원했던 주민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히에로니무스 로트가 이끄는 쾨니히스베르크 수도의 시민들은 베흘라우 조약과 올리바 조약을 거부하고 프로이센을 "폴란드 왕관 영토 내에 명백하게 포함된 지역"으로 간주했다.[16] 폴란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국왕과 폴란드 왕국을 위해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1662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대를 이끌고 도시에 진입하여 도시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1675년, 폴란드-프랑스 야보루프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이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폴란드의 노력을 지원하고, 폴란드는 프랑스 편에 서서 진행 중인 프랑스-브란덴부르크 전쟁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17] 그러나 이 조약은 이행되지 않았다.

2. 3. 2. 베흘라우 조약과 올리바 조약

1656년 쾨니히스베르크 조약을 통해 스웨덴의 봉토가 되었던 프로이센 공국은, 라비아우 조약으로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 완전한 주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폴란드 왕 얀 2세는 이에 대응하여 역제안을 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를 수락하여 1657년 9월 19일 베흘라우 조약을 체결했다.

베흘라우 조약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스웨덴과의 동맹을 포기하는 대가로, 얀 2세는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완전한 주권을 인정했다.[15] 이로써 거의 200년 동안 폴란드의 종주권 아래 있던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의 완전한 주권 하에 들어갔다. 1660년에는 올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들로 인해, 독일 기사단국으로부터 2세기 가까이 계속된 폴란드의 종주권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폴란드 종주권의 종식은 브란덴부르크의 절대주의를 두려워하고 폴란드 왕령에 남기를 원했던 주민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히에로니무스 로트가 이끄는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은 베흘라우 조약과 올리바 조약을 거부하고 프로이센을 "폴란드 왕관 영토 내에 명백하게 포함된 지역"으로 간주했다.[16] 크라쿠프 조약에 따라 폴란드 왕령에 편입되는 것은 쾨니히스베르크 시가 승인했지만, 폴란드로부터의 분리는 도시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되었다.[16]

2. 4. 프로이센 왕국으로의 승격

1657년 베흘라우 조약과 1660년 올리바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공국은 브란덴부르크의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완전한 주권을 획득했다.[15] 이는 1701년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3세가 프로이센 공국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시키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었다.[4]

그러나 폴란드 종주권의 종식은 주민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절대주의를 두려워한 주민들은 폴란드 왕국의 일부로 남기를 원했다.[16] 히에로니무스 로트가 이끄는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은 조약을 거부하고 프로이센을 "폴란드 왕관 영토 내에 명백하게 포함된 지역"으로 간주했다.[16] 이들은 폴란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국왕과 폴란드 왕국을 위해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1662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대를 이끌고 도시에 진입하여 도시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이후에도 폴란드 종주권 회복을 위한 시도가 있었다. 1675년 폴란드-프랑스 야보루프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폴란드의 영토 회복 노력을 지원하고, 폴란드는 프랑스-브란덴부르크 전쟁에 프랑스 편으로 참전하기로 했으나,[17] 이 조약은 이행되지 않았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프로이센의 왕”으로 승격되었다. “프로이센 국왕”이 아닌 “프로이센의 왕”이라고 한 것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이 신성 로마 제국 레오폴트 1세의 종주권 하에 있음을 재확인하여 레오폴트 1세의 분노를 사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의 수도 베를린에서 통치되었다.

3. 역대 군주


  • 알브레히트 1세(1490-1568): 브란덴부르크선제후 알브레히트 아킬레스(1414-1486)의 넷째 아들 프리드리히(1460-1536)의 셋째 아들
  • 알브레히트 2세(1553-1618):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 요한 지기스문트(1572-1620): 알브레히트 2세의 종손이자 사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프로이센 공작인 요한 게오르크(1525-1598)의 손자.
  • 게오르크 빌헬름(1595-1640): 요한 지기스문트(1572-1620)의 아들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620-1688)
  • 프리드리히 1세(1657-1713)

참조

[1] 문서 The duchy's Evangelical (Protestant) church was the first formally established as a state religion.
[2] 서적 Notes and Querie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Związek Pruski i poddanie się Prus Polsce: zbiór tekstów źródłowych Instytut Zachodni
[4] PDF http://bazhum.muzhp.[...] 2022-03-00
[5] 웹사이트 Mažosios Lietuvos Bažnyčia XVI-XX amžiuje http://www.liuterona[...] Klaipėda 2011-08-28
[6] 서적 The Northern Crusades Penguin Books
[7] 서적 The Monks of War: The Military Religious Orders Penguin Books
[8] 서적 Northern Europe in the Early Modern Period: The Baltic World, 1492–1772 Longman
[9] 서적 A History of Prussia Barnes & Noble Books
[10] 웹사이트 Mažosios Lietuvos Bažnyčia XVI-XX amžiuje http://www.liuterona[...] Klaipėda 2011-08-28
[11] 서적 Preußen: Zur Sozialgeschichte eines Staates Rowohlt
[12] 서적 The Teutonic Knights: A Military History Greenhill Books
[13] 서적 The Hohenzollerns The Century Co.
[14] 웹사이트 Jerzy Ossoliński h. Topór https://web.archive.[...] 2020-09-11
[15] 서적 Polen. Ein geschichtliches Panorama Wydawnictwo Interpress 1983
[16] 문서 Polska a Królewiec Komunikaty Mazursko-Warmińskie
[17] 웹사이트 11 czerwca 1675 roku król Polski Jan III Sobieski i ambasador króla Francji Ludwika XIV podpisali tajny traktat w Jaworowie https://historykon.p[...] 2020-10-24
[18] 웹사이트 Mažosios Lietuvos Bažnyčia XVI-XX amžiuje http://www.liuterona[...] Klaipėda 2011-08-28
[19] 서적 The Northern Crusades Penguin Books
[20] 서적 The Monks of War: The Military Religious Orders Penguin Books
[21] 서적 The Teutonic Knights: A Military History Greenhill Books
[22] 서적 Northern Europe in the Early Modern Period: The Baltic World, 1492–1772 Longman
[23] 서적 A History of Prussia Barnes & Noble Books
[24] 서적 Preußen: Zur Sozialgeschichte eines Staates Rowohlt
[25] 웹사이트 Mažosios Lietuvos Bažnyčia XVI-XX amžiuje http://www.liuterona[...] Klaipėda 2011-08-28
[26] 서적 The Hohenzollerns The Century Co.
[27] 서적 Polen. Ein geschichtliches Panorama Wydawnictwo Interpress 1983
[28] 서적 Polen. Ein geschichtliches Panorama Wydawnictwo Interpress 1983
[29] 문서 Polska a Królewiec Komunikaty Mazursko-Warmińsk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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